
가을 제주 식재료 전쟁, 호텔이 메뉴판을 바꾸는 이유
9월로 접어들면서 제주 호텔가의 메뉴판이 한꺼번에 바뀌고 있다. 제주신라호텔은 9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제주 지역 식재료와 제철 재료를 앞세운 가을 한정 미식 메뉴를 내놨고, 그랜드 조선 제주도 미식을 묶은 가을 패키지를 선보였다. 계절 메뉴 교체야 해마다 있는 일이지만, 올가을은 ‘제주산’을 메뉴판 전면에 내세운 곳이 눈에 띄게 늘었다.
제주신라호텔의 경우 일식당 ‘히노데’에서 가을 한정 디너 코스 ‘코요우’를, 올 데이 다이닝 ‘더 파크뷰’에서 ‘가을 셰프 컬렉션’을 함께 내놨다. 여기에 풀사이드 바의 가을 루프탑 칵테일 4종이 붙는다. 재료 구성을 보면 방향이 분명하다. 가을을 대표하는 송이버섯과 연근에, 제주산 옥돔과 부채새우, 제주 한우가 코스의 중심에 놓였다. 예전 같으면 수입 식재료나 계절과 무관한 재료가 채우던 자리다.

왜 하필 지금, 이런 변화가 몰려왔나
이 흐름을 이해하려면 최근 몇 년간 제주 관광 다이닝을 둘러싼 사정을 먼저 봐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회복된 제주 방문객 수요는 예전만큼 폭발적이지 않았고, 호텔업계는 객실 판매만으로는 수익을 방어하기 어려워졌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게 F&B, 즉 식음료 매출이다. 투숙객이 아니어도 예약할 수 있는 레스토랑 다이닝이 별도의 수익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호텔들은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코스’를 경쟁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육지 유명 셰프들이 제주에 들어와 팝업이나 상주 매장을 여는 사례가 늘면서 경쟁 강도 자체가 달라졌다.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는 요리로는 더 이상 관광객을 붙잡기 어렵다는 판단이 업계 안에 퍼졌고, 그 결과가 ‘제주산 재료를 전면에 내세운 계절 메뉴’라는 방향으로 모아진 셈이다. 마침 9월은 갈치 어획이 늘고 감귤 극조생종 출하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시기적으로도 재료 전환의 명분이 뚜렷했다.

주방과 시장에서 벌어지는 실제 변화
메뉴판 위의 변화는 눈에 잘 띄지만, 그 이면에서 더 크게 달라진 건 구매 방식이다. 예전에는 대형 유통업체를 통해 냉동·가공된 재료를 받아 쓰던 호텔 주방들이 지역 어촌계, 소규모 영농조합과 직접 계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물량이 한정된 제철 해산물일수록 어획 시기에 맞춰 미리 물량을 협의해 두어야 코스 구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하는 건 지역 상인과 농가다. 호텔이 안정적인 구매처가 되면서 일부 감귤 농가는 극조생 물량 일부를 도매시장 대신 호텔·레스토랑에 우선 공급하는 쪽으로 판로를 조정했다. 반대로 물량이 한정된 성게나 딱새우 같은 재료는 호텔 수요가 몰리면서 동네 식당이나 시장 상인이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워졌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같은 재료를 두고 관광업계와 지역 밥상이 경쟁하는 구도가 생긴 셈이다.
방문객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늘었다는 점이 체감된다. 예전엔 흑돼지와 갈치조림 정도로 요약되던 ‘제주 미식’의 이미지가, 코스 요리·오마카세·파인다이닝 영역까지 넓어지면서 여행 목적 자체를 다이닝으로 잡는 방문객도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게 관련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관찰이다.

섬이라는 조건이 만드는 딜레마
다만 이 흐름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다. 제주는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식재료 수급이 육지보다 훨씬 날씨와 계절에 취약하다. 태풍이 한 번 지나가면 어선 조업이 며칠씩 멈추고, 갈치나 자리돔 어획량이 들쭉날쭉해진다. ‘제철 재료 중심 메뉴’를 표방한 레스토랑일수록 이런 변수에 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철 어종을 앞세운 코스일수록 조업이 며칠 멈추면 메뉴를 급히 바꿔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관광 의존도가 높다는 점도 변수다. 성수기와 비수기 편차가 뚜렷한 제주 관광 특성상, 가을 성수기에 맞춰 짜인 메뉴가 비수기에도 같은 수익성을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재료 원가가 시즌마다 크게 출렁이는데, 메뉴 가격은 쉽게 올리기 어려운 것도 현장의 고민이다.

다른 지역의 경험이 주는 힌트
비슷한 흐름은 제주만의 일이 아니다. 강원도 속초·양양 일대 호텔들도 몇 해 전부터 동해안 제철 어종을 앞세운 다이닝을 늘려왔고, 전남 여수·통영 지역 역시 지역 수산물을 브랜드화하는 방식으로 관광 다이닝을 키워왔다. 이들 지역의 공통된 경험은, 초반에는 화제성으로 방문객을 끌지만 몇 년이 지나면 ‘진짜 그 지역 재료인가’를 따지는 소비자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원산지 표기나 조달 과정이 불투명하면 오히려 신뢰를 잃는 경우도 있었다.
제주 역시 이 지점에서 자유롭지 않다. 메뉴판에 ‘제주산’이라고 써 붙이는 것과, 실제로 어느 어촌계·농가에서 왔는지를 밝히는 것 사이에는 신뢰의 격차가 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앞으로 이 흐름이 일회성 유행에 그칠지, 제주 다이닝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을지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들
가을 시즌 메뉴 개편이 겨울까지 이어질지, 아니면 계절이 바뀌면 다시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 제주신라호텔의 가을 메뉴가 11월 말까지로 예고돼 있는 만큼, 겨울 시즌을 어떻게 이어갈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다. 어촌계와의 계약 물량을 장기 협약으로 늘릴지, 아니면 시즌마다 단발성 구매로 유지할지도 업체별로 결정이 다르다.
지역 농가와 어민 입장에서는 이 수요가 안정적인 판로로 굳어질지, 아니면 반짝 특수에 그칠지가 관건이다. 호텔 쪽 수요만 바라보고 생산 계획을 바꿨다가 이듬해 수요가 줄어들면 타격이 클 수 있다는 우려도 현장에서 나온다. 결국 이 변화가 제주 미식 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는, 다음 계절에도 같은 흐름이 반복되는지를 봐야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마무리
가을 제주의 새벽 위판장에서 시작된 이 변화는 단순한 메뉴 교체를 넘어, 관광지 제주가 스스로의 미식 정체성을 다시 쓰는 과정이기도 하다. 브랜드나 광고주 입장에서 보면, ‘제주산’이라는 표기 하나로는 더 이상 차별화가 되지 않는 시점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디서 난 재료인지, 누가 길러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브랜드일수록 이 경쟁에서 신뢰를 얻을 여지가 크다. 스토리와 산지가 명확한 로컬 재료를 콘텐츠로 풀어낼 준비가 된 곳이라면, 지금이 바로 그 이야기를 시작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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