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원도심 퐁낭 아래 마련된 동네 주민 쉼터 공간
Jeju 2026.09.04

제주 원도심 퐁낭 아래, 동네 브랜드가 모이는 이유

오후 세 시, 제주시 원도심 골목 한 귀퉁이. 수백 년은 됐음직한 팽나무, 그러니까 제주말로 ‘퐁낭’ 한 그루가 만든 그늘 아래 평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할머니 두 분이 부채를 부치며 앉아 있고, 그 옆으로는 근처 카페에서 내온 듯한 종이컵 몇 개가 놓여 있다. 평상 위쪽에는 작은 나무 팻말이 걸려 있는데, 인근 상점 이름과 함께 “누구나 앉아 쉬어가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이 지도 앱을 보다 말고 이 그늘 아래 잠시 걸터앉는다. 원도심 골목을 걷다 보면 요즘 부쩍 자주 마주치는 풍경이다.

퐁낭은 제주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정자목이다. 마을 입구나 공터에 심어 여름이면 그늘을, 겨울이면 바람막이를 내주던 나무로, 예로부터 마을 회의나 잔치, 아이들 놀이터 구실을 겸해왔다. 원도심에서는 산지천 주변과 칠성로 뒷골목, 동문시장에서 신산공원으로 이어지는 옛길 곳곳에 이런 퐁낭이 남아 있는데, 최근 이 나무 그늘을 중심으로 벤치나 평상, 작은 안내판을 놓아 쉼터로 꾸민 공간이 하나둘 늘고 있다. 상점 하나가 자기 가게 앞 퐁낭 밑에 의자 몇 개를 내놓는 수준부터, 여러 점포가 힘을 모아 그늘 공간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경우까지 형태는 다양하다.

골목마다 생겨나는 그늘 쉼터, 무엇이 달라졌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사유지와 공유지의 경계가 모호했던 나무 그늘이 ‘누구나 쓸 수 있는 자리’로 다시 정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퐁낭 아래 평상이 있어도 특정 어르신들의 지정석처럼 여겨지거나, 상점 주인이 개인적으로 놓아둔 의자 정도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 새로 정비되는 공간들은 성격이 다르다. 팻말이나 작은 안내문을 달아 외부인도 부담 없이 앉을 수 있다는 신호를 분명히 준다는 점,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카페나 소품점, 베이커리 같은 로컬 브랜드가 이 공간을 자기 매장의 연장선처럼 관리한다는 점이 다르다.

동문시장 뒷골목이나 산지천 인근을 걷다 보면 이런 그늘 공간 옆에 QR코드가 붙은 작은 표지판을 볼 수 있는데, 매장 소개나 동네 지도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거창한 시설을 새로 짓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나무와 그늘이라는 자원에 최소한의 손질만 더해 ‘머무를 이유’를 만드는 방식이다. 벤치 몇 개, 문구 하나, 관리 주체 하나가 더해졌을 뿐인데 골목의 체류 시간이 달라지고 있다는 게 이 일대를 자주 오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체감이다.

퐁낭 그늘 아래 놓인 평상과 벤치

왜 하필 지금, 원도심에서 이런 움직임이 나오나

이 변화를 이해하려면 원도심이 겪어온 부침을 먼저 짚어야 한다. 제주시 원도심은 신제주와 노형 상권이 커지면서 오랫동안 공동화 우려를 안고 있던 지역이다. 산지천 정비, 동문시장 야시장 활성화, 최근의 산지천 컬러풀 페스티벌 같은 축제성 이벤트들이 이어지면서 방문객 발길은 늘었지만, 그 발길이 골목 안쪽 작은 상점까지 이어지느냐는 별개 문제였다. 큰 행사가 끝나면 다시 조용해지는 골목이라는 지적도 꾸준히 나왔다.

이런 흐름 속에서 로컬 브랜드들이 주목한 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람이 머무는 자리’다. 축제는 특정 기간에 사람을 불러 모으지만, 그늘 쉼터는 평일 오후에도, 비수기에도 동네 사람과 여행객을 자연스럽게 섞이게 만든다. 제주는 관광 성수기와 비수기의 매출 편차가 뚜렷한 지역이라, 계절을 타지 않고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장치에 대한 갈증이 상인들 사이에 컸다. 퐁낭 그늘은 여름엔 더위를, 겨울엔 매서운 바람을 피하는 실질적 기능이 있어 계절 편차를 어느 정도 상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원도심 골목의 작은 상점가 풍경

주민과 상인, 방문객이 각자 다르게 느끼는 변화

원도심에 오래 거주해온 주민들 입장에서는 익숙한 나무 밑이 정비되는 게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평생 앉아 쉬던 자리에 못 보던 사람들이 늘어나고, 매장 안내판이 붙는 걸 보며 “이러다 우리 자리가 아니게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 섞인 말도 나온다. 실제로 그늘 공간을 상업적으로 과도하게 활용해 매장 홍보물만 잔뜩 붙여놓는 경우, 오히려 주민들이 발길을 끊는 역효과도 관찰된다. 반대로 상점이 평상을 관리해주고 청소나 정리를 도맡으면서 어르신들과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고, 명절이나 동네 행사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한 사례도 있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이 공간이 ‘광고판’이 아니라 ‘관계의 장’으로 기능할 때 효과가 오래간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 그늘 밑에 앉았던 관광객이 옆 카페에서 음료를 사가고, 동네 어르신이 손주에게 그 가게를 추천해주는 식의 흐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면 방문객들은 이런 공간을 SNS에서 ‘숨은 쉼터’로 소개하며 찾아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정형화된 관광지 사진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찍은 사진이 오히려 더 눈길을 끄는 요즘 분위기와도 맞아떨어진다.

동네 주민들이 모이는 야외 장터

다른 지역의 마을 정자, 골목 쉼터는 어떻게 흘러갔나

정자나무, 쉼터를 매개로 한 골목 활성화는 제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주 한옥마을이나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처럼 특정 콘텐츠 하나로 관광객이 몰렸던 지역들은 초반의 열기가 식으면서 상업화 피로도, 원주민 이탈 같은 부작용을 겪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나온 바 있다. 이런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남긴 교훈은 ‘공간을 꾸미는 것’과 ‘관계를 관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라는 점이다. 벤치를 놓고 사진 찍기 좋게 꾸미는 건 비교적 쉽지만, 그 공간이 주민의 일상과 계속 맞물려 돌아가게 만드는 건 훨씬 더디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제주 원도심의 퐁낭 쉼터가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결국 관리 주체가 누구인지, 그 주체가 상업적 이익과 공공성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는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개별 상점이나 소상공인 몇몇이 자발적으로 꾸리는 수준이라, 제도적 지원이나 통일된 관리 기준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제주시 차원의 별도 사업으로 명문화된 것은 아니어서, 이런 공간들이 앞으로 공공 자산으로 편입될지 개별 상점의 마케팅 자산으로 남을지는 지켜봐야 하는 부분이다.

제주 원도심의 돌담길 골목

앞으로 지켜볼 지점들

가장 먼저 지켜봐야 할 건 이 공간들의 지속가능성이다. 나무 그늘 정비는 비용이 크지 않아 진입장벽이 낮은 만큼, 우후죽순 늘어난 뒤 관리가 안 되는 공간이 방치될 가능성도 있다. 평상 하나 놓는 것보다 그걸 꾸준히 청소하고 관리하는 인력과 비용을 누가 감당할지가 실제로는 더 큰 문제다. 두 번째는 원도심 특유의 노후 인프라와의 충돌이다. 좁은 골목, 노후한 배수시설, 주차 공간 부족 같은 원도심의 오래된 숙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쉼터만 늘어나면 오히려 통행에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세 번째는 제도화 여부다. 원도심 골목 상권과 관련해서는 이미 이호테우 골목형상점가 지정처럼 지자체가 상권 활성화를 위해 제도적 틀을 마련한 선례가 있다. 퐁낭 쉼터 역시 개별 상점의 자발적 움직임을 넘어 마을 만들기 사업이나 골목 상권 지원 정책과 결합될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이는 아직 확정된 방향이 아니다. 제주시나 관련 부서의 공식 사업으로 편입될지, 아니면 지금처럼 상점가 단위의 자율적 실험으로 남을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사안이다.

나무 그늘 아래 놓인 카페 야외 좌석

로컬 브랜드에게 이 그늘이 갖는 의미

퐁낭 그늘 하나를 정비하는 데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로컬 브랜드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려한 인테리어나 대규모 마케팅 예산 없이도,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자원과 동네 사람들의 관계를 조금만 다듬으면 방문객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접점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이 사례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이 방식이 효과를 내려면 단발성 포토존이 아니라 주민과의 관계를 꾸준히 쌓는 시간이 전제돼야 한다는 점도 함께 새겨야 할 대목이다. 골목 안쪽 작은 그늘 하나가 브랜드와 동네를 잇는 접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원도심의 퐁낭들이 지금 조용히 증명해가고 있다.

그늘 아래 앉아 쉬는 동네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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